기회가 닿는대로 선한 일을

새 예배당으로 이사 온 지도 6개월이 지나갑니다. 단순히 예배장소가 필요해서 찾아온 곳인데,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하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러빗은 3주년 감사 Home Project 준비를 하며 처음 만났습니다. 매일 미국교회에 점심을 먹으러 오는 노숙인분들 중에, 젊은 흑인여성이 있어서 초대했습니다. 날이 추워지는데 유독 얇은 외투를 입고, 다른 분들에 비해 너무 어려 보여 청년들 생각도 나고 해서 ‘꼭 오라’고 여러 차례 권했습니다. 그리고 행사 당일, 와서 치킨숩도 잘 먹고, 새 침낭에, 큰 쇼핑백에 한 짐을 챙겨서 돌아갔습니다. 

며칠 후 사무원인 Divine이 제게 와서 ‘러빗이 너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나가보니, 며칠 전 받은 새 침낭을 도둑 맞았다고 하나 더 받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새 침낭을 챙겨주고 꼭 따뜻하게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종종 점심시간에 만나 안부를 나누곤 했습니다. 며칠째 강추위가 계속 되던 어느날, Divine이 ‘너 혹시 소식 들었냐’며 물어 왔습니다. 러빗이 강추위에 공원에서 자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청년처럼 어려 보여도 아이가 하나 있다고 했는데, 옷도 새 침낭도 여러 번 줬는데 늘 춥게 하고 다니더니. 며칠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주일예배 중에 흐느껴 울기도 했습니다. 

며칠째 슬퍼하던 어느날 기도 중에 든 생각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웃으며, 테이블에 앉아서, 직접 요리한 식사를 했던 것이 아마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까. 외투도, 새 침낭도, 러빗의 마음에는 따뜻한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추위와 외로움과 싸우던 여기보다, 따뜻한 주님 품에 안긴 지금이 더 낫지 않을까. 오랜 후에 우리 주님 앞에서 러빗을 만나면, 아마 많이 반가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따뜻하게 위로해 주셨습니다.

오스카 아저씨는 늘 저를 찾아서 당당하게 부탁을 합니다. 라이드를 해 달라. 건물 안에서 먹게 해 줘라. 내 짐을 맡아줘라, 몇 시까지 찾으러 오겠다. 우버 불러달라. 그러면서, 기회만 되면 자신의 계획을 얘기합니다. 지금 한 쪽 눈이 아파서 수술 받아야 하는데 치료 받기가 어렵다. 겨울이 되면 디씨는 추워서 남쪽으로 가고 싶은데, 준비가 어렵다. 체구가 워낙 작기도 하고 늘 부탁을 하셔서, 뭔가 안타까움 반 끌려다니는 마음 반 해서 자주 도움을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Divine이 전화해서 ‘오스카가 코비드에 걸렸다고 하는데, 너도 close contact 일 지 몰라서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괜찮았고, 걱정이 무색하게 격리를 마치고 다시 나타나서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몇 주 전, 자신의 짐을 메릴랜드의 동생에게 보내야 한다며 제게 Uber 를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일정이 맞지 않아 서로 약속이 엇갈린 채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날은 꼭 짐을 보내야 한다고 하길래, 시간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심방 시간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먼저 떠나던 제게, 오스카 아저씨는 ‘지금 버스 타고 가고 있다’는 말만 반복할 뿐 결국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오스카의 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말기암을 발견해서, 소셜워커를 통해 숙소와 병원치료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오스카 아저씨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울 아저씨는 교회 입구 주차장 한켠에서 주무십니다. ‘누가 날 보고 있다’고 스패니시와 영어를 섞어 말씀하시며 ‘너도 조심하라’고 호의(!)를 담아 주의를 주곤 했습니다. Home Project를 하는 우리에게 ‘최고’라고 칭찬도 해주고, 가끔은 알 수 없는 말로 화를 내곤 해도, 제가 처음으로 노숙인분들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해 준 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을 떠올린 것도, 처음 말을 걸고 이름을 나눈 것도, 매일 일과의 시작과 끝을 스몰토크로 열어준 것도 모두 파울 아저씨였습니다.

덩치가 커서인지 매서운 추위가 연일 계속 되어도 괜찮다고 하던 파울. 덕분에 저희 아이들도 성도님들도 눈이 오거나 기온이 내려가면 파울 아저씨 걱정을 합니다. 항상 주차장 한켠에 이불+옷가지+음식물 산더미를 만들어 두던 파울 아저씨. 어느날부터인가 보이지 않다가, 급기야 아저씨의 짐더미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소식을 물어보니, 본인 요청으로 쉘터에 들어가게 되었고 병원 진료도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파울 아저씨와 인사도 못했지만, 그래도 잘 된 일입니다. 이제 만나기 어려워져서 아쉽지만(?), 짧은 시간 동안 후회 없이 섬길 수 있었어서 다행입니다. 

선한 일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일도,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즉시 순종한 여는교회 성도들 생각에 든든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되” (갈 6:10)

Merry Christmas!

올해 여는교회는 조금은 불안하게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수가 급증하면서 성도들은 잘 모이지 못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갑작스럽게 이전 예배당에서 이사해야 했습니다. 알링턴 주변의 예배당들이 다 문을 닫아서 막막한 중에, 역시 문을 닫은 한 교회에서 예배장소를 빌려주겠다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렇게 텅 빈 도시와 예배당이 있는 새로운 지역으로 와서, 재미있는 변화와 도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사 후에 청년들이 매주 방문하고 있고, 새로운 노숙인 이웃들과 함께 Home Project: Soup Kitchen 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못할 줄 알았던 Thanksgiving 만찬도 하고, 급기야 노숙인 이웃들을 위한 Coat Drive 도 진행합니다.

연초에는 모든 계획이 막히거나 변경되어서 조금 어려웠는데,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도전들로 훨씬 재미있는 한 해가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변화를 기뻐하면서 행복하게 동참하는 성도들과 함께, 여는교회는 재미있는 연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3주년 감사 프로젝트 "Home"

4개월 전, 처음 Rosslyn 예배당으로 이사 왔을 때 우리를 반겨 준 분들은 노숙인들이었습니다. 팬데믹으로 오랜 기간 건물들을 사용하지 않아서였는지, 빈 주차장 곳곳에 노숙인분들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부끄럽게도 저의 첫 마음은 “냄새가 너무 심하다”, 그리고 “새벽기도나 저녁모임 때 자매들이 불안할텐데”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출근 때마다 특별한 감정 없이 그분들을 지나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아침, ‘냄새가 심하네’ 하며 계단을 오르던 중 떠오른 풍경이 있었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 주변에는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 거주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종교인들에게 그들은 성전 주변 풍경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달랐죠. 그들의 마음을 보셨고, 손도 내밀어 주셨습니다. 저도 이 분들을 도시의 풍경 중 하나로 어쩌면 그보다 더 불편한 마음으로 감정 없이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날부터 그 분들의 이름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계단 밑에 내려가서 안부를 묻고, 따로 떨어져 식사를 하고 있는 분이 계시면 음료수를 사다 드렸습니다. 안전한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으며 몇 분과는 서로 웃으며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9월부터 온라인 남성큐티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큐티방 형제들이 묵상과 적용으로 노숙인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도시인’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지난 몇 주간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준비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급기야 한 형제의 제안으로 ‘노숙인분들을 초청한 만찬’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저는, 주님의 음성으로 알고 형제들을 따라 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3주년 예배를 앞둔 시점이라, VIP 게스트 초대하는 마음으로 “Home Project”를 준비했습니다.

매일 이분들을 찾아가 초대장을 전하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숙인분들 중에도 베지테리안이 있어서 다양한 옵션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한 성도님께서 침낭을 여러 개 기증해 주셔서 필요를 파악하던 중, 한 노숙인분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침낭이나 이불을 가지고 다니면서 노숙인이라는 것을 티내고 싶지 않아요. 외투를 구할 수 있으면 그걸 선호합니다.” 한 젊은 여성분은 “짙은색 침낭이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이해 못했는데, 빨래를 하기 어려워서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늘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던 ‘모니카’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는데, 주변분들이 얘기해 주길 “모니카는 20년만에 처음으로 집을 구해서 거리생활을 마감했어요”라고 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임신 7개월째인데, 쉘터에서 나와 거리를 다니던 여성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도울 수 없는 일과 사람들이 도시 곳곳에 있었습니다. 추수할 일꾼을 구하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3주년 감사 만찬은 행복했습니다. 이사간 성도님들이 5시간을 운전해서 찾아오시기도 했고, ‘어린성도’들도 케이크를 굽고 자기들의 캔디를 후식으로 나눠 주었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무엇보다 참여하신 성도님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가실지 모두들 기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앞으로 목사님은 힘들어 지시겠지만” 이라고 웃으며 인사하네요. 전 저만 힘들어지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만 ㅎㅎ

정리를 마치고 주차장을 나서는데, 늘 주차장에 계시는 파울 아저씨가 인사하시네요. 오늘 너희 베스트였다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예측이 어렵지만, 제 기대대로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항상.

1주년 감사 특별새벽기도

Nov 6, 2019

여는교회는 이번 한 주간 특별한 새벽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 첫 수련회를, 주일에는 1주년 감사예배를, 그리고 월요일부터 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새벽에 운전하다 보면 Ballston 시내는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예배당 건물도 잠들어 있습니다. 예배당 문을 열고 불을 켜는 반복되는 일상이, 이번 주간에는 조금 더 감사했습니다. 이 새벽에 잠든 도시를 깨우고, 잠자는 예배의 자리를 기도로 깨운다는 생각이 든 까닭입니다.

새벽에 기도의 문을 열며, 여는교회의 성도들, 특히 어린 성도들을 지난 1년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여러 일들로 흔들렸던 저희 가정을 성실하게 돌보신 좋으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아직 잠자고 있는 도시를 사랑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닫힌 길을 열고, 어두운 도시에 빛을 비추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생각에 따뜻한 새벽입니다.

앞으로 더 성실하게 그 뜻을 펼치실 좋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여는교회는 이번 한 주간 감사한 새벽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평안을 전합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

청년 때 뒤늦게 회심을 경험한 후,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성경말씀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당시 전도사님의 권유로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하면서 졸지에 성경통독과 함께 전체 성경을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3년간 아이들과 성경 전체를 공부하면서 가슴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대로 성경말씀은 Logic on Fire 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단계로 저를 이끌어 가셨는데, 바로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얼떨결에 금식철야기도를 해 보겠다고 결심하고 교회에 간 첫날 저녁. 막상 자리에 앉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할 말도 의지도 없어져 멍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금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시계를 노려보다가, 정한 시간 땡 하자마자 급하게 음식을 챙겨 먹고 나서야 진정한 위로(?)를 경험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 날을 시작으로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열정을 주셨습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몇 년을 살았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학교 끝나면 기도하러 교회에 들르고, 공강 시간에는 운동장에 가서 스탠드 구석에 앉아 기도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은 확신과 열정으로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통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제 입에서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을 이루게 하소서!’ 하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요즘에는 ‘통일한국’이란 것이 온갖 정치적인 명제로 사용되며 그 당위성 조차 흐릿해졌고, 실제로 민족적, 정치적, 혹은 휴머니즘의 측면에서 다양한 입장들로 논의가 있지만, 당시의 뜨거웠던 저에게 ‘통일한국’이란 단어는 ‘성서한국’의 지향점이며 ‘선교한국’의 선결조건인 것 같은 중대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혼자서 ‘통일한국’을 위해 40일 작정 금식기도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도를 같은 시기에 혼자 작정하고 새벽기도 다니던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통일한국’에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한 마음의 빚을 가지고, 그리고 어쩐지 통일한국-선교한국 으로 가는 일을 등한시 한 것 같은 복음의 빚을 진 채로 어느새 10년도 넘는 시간이 지나 버렸습니다.

‘여는교회’를 시작하며 몇 가지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통일한국’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가 닦아 놓은 길을 지나며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의 문을 열었듯, 여는교회가 통일한국을 통해 열릴 길을 지나며 닫힌 문을 열게 되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오전, 비 오는 날이었는데 한 청년이 우비(?)를 입고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당시만 해도 초기라 (아직도 초기지만) 성도가 10여명 남짓할 때였는데, 갑자기 들어온 청년이 놀랍기도 낯설기도 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고향이 평양이라고 해서 너무 놀랐습니다. ‘통일한국’을 꿈꾸는 청년이어서 더 놀랐고, 지나다가 보여서 들어온 교회라고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우리 교회에 정착해서 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통해 ‘선교팀’이 시작되었습니다. 선교팀의 첫 시작으로 <영화상영회>를 진행합니다. 저는 이 시간을 통해 ‘통일한국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과 마음’이 교회에 부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적 혹은 민족적인 당위성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없고 교회가 없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이 우리교회와 이 도시에 허락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

20년 전 외치며 기도하던 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정신 더 뜨거운 열정으로 꿈꾸며 <영화상영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땅의 형제들을 오늘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들에게 진 복음의 빚을 갚을 길이 아직은 이런 것 밖에 없어 민망한 마음입니다.

새 예배장소

어제 밤 늦게 한 청년으로부터 메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 알링턴에 아마존 본사가 들어선대요!" 오전에 한 목사님으로부터도 같은 메세지가 왔습니다. 이제 교회가 막 시작되었는데 마침 많은 영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다고 하니 기쁜 소식으로 여기고 전해 주신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마존이 온다는 Crystal City는 저희 교회에서 불과 7마일 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에게 든 첫번째 생각은 '교회 임대료가 엄청 오르겠다' 였고, 두 번째 생각은 '지금도 막히는데 앞으로 새벽기도 갈 때마다 더 막히겠네' 였습니다. 동네 이웃들도 이야기 하는데, 대부분 크게 반가워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큰 딸 승민이와도 차에서 잠시 얘기를 나눴습니다. "아마존이 오면, 회사와 공장을 짓기 위해 나무와 잔디밭을 다 파괴해야 하고 난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딸아이 생각이 제법 기특합니다. "아마존을 만들기 위해 나무와 숲을 없애야 하다니 재미있는 아이러니네". 계속되는 승민이의 대답입니다.

그 와중에 <여는교회>는 예배장소를 옮겼습니다. 같은 건물 3층에 훨씬 더 넓고 밝은 곳으로, 무엇보다 한 달 내내 저희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예배당과 친교실/교육관이 생겼습니다. 지난 100일 동안 일주일에 주일 2시간만 사용하면서, '주중에도 기도하고 양육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신기한 방법으로 저희에게 장소를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된 공간이라 낡고 손 볼 곳이 많았지만, 지난 1달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그 분의 방법과 가장 정확한 때에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진행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 드디어 새 예배당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내친 김에 매일 새벽 모여서 특새도 했습니다. 이제는 주중에 양육도 교회에서 합니다. 새벽에도, 오전에도, 오후에도 합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이 '약속'과 '부르심'만 보고 왔는데, 아마 하나님께서 미리 많은 것을 준비하고 계셨나 봅니다. 그러고 보면 아마존이 오고 혹 임대료가 제아무리 올라도, 아마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 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편 91:14)

노방전도 이야기 (1)

교회개척을 준비하며 도서관이나 카페 등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교회에 대한 경험이나 생각을 묻곤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대화를 나눴던 많은 분들이 개신교회에 대해 몇 가지 공통적인 경험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교회의 권위적인 문화, 율법과 도덕 중심의 가르침, 정답이 이미 정해져서 토론이 되지 않는 일방적인 대화 등의 이유로 이제는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많이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의 정신을 다른 종교나 불신자들의 모임에서 더 많이 경험하고 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이 분들이 지금은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인 얘기가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히 우리가 반성할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집 앞 자주 가는 카페에서 늘 마주치던 60대 후반 정도의 백인 여성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에 10년을 살았다고 하자, 본인도 랜캐스터의 아미쉬 마을 출신이라고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님은 청년 때에 아미쉬 마을을 떠났다가, 결혼하면서 다시 마을로 돌아가 이 여성을 포함한 다른 자녀들과 함께 성실하게 교회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교회생활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얼른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고 싶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래도 주일학교에서 재미있는 경험이 없었느냐고 묻자, '그것은 교회와 관계가 없는 단어 같은데'라며 웃었습니다. 성장기의 고민에 대해서는 불신앙이라고 훈계를 듣고, 늘 정해진 답과 율법적인 교훈만 돌아 와서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미쉬 마을을 떠나 대학을 포코노 근처 Bethlehem 지역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며 오히려 자유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종교다원주의에 눈을 뜨고, 다양한 종교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참사랑과 배려를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시작한다고 말하는 제게 '꼭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사람들을 만나 보세요'라고 이야기 하는 그녀의 미소엔 어쩐지 날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가시 돋힌 태도가 아픈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간 경험해 온 성도들의 냉대와 무관심이 저를 더 아프게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영혼의 닫힌 마음과 상처가 제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라고 말하며 속으로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사실 이 여성분의 반응이 놀랍거나 특별하지 않았던 것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나눠 주었습니다. 

노방전도를 시작하며, 말을 하기 보다는 들으려고 했습니다. 가르치기 보다는, 정답이 여기에 있다고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상대방의 삶과 마음을 충분히 듣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떠난 동네 전도여행의 길 위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이, 메마르고 건조한 38년된 병자가, 냉대와 분노로 대놓고 예수를 공격하는 각종 귀신 들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바깥으로 나오니, 집 나간 아버지의 둘째 아들들이 도처에 있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녀보니 모든 병든 자와 약한 자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 9:36-38)

새벽기도

2달간의 특별새벽기도를 오늘 마쳤습니다. 

처음 워싱턴 디씨에 한인교회를 시작하려고 내려 왔을 때 생각한 지역은 Crystal City 였습니다. 그러나 직접 디씨와 알렉산드리아 지역을 둘러보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은 Arlington Downtown 지역이었습니다. 워싱턴 디씨는 물론, VA/MD 에서도 대중교통으로 혹은 승용차로 오기가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기도하며 Rosslyn, Clarendon, Courthouse, Ballston 지역들을 걸었습니다. 날마다 골목을 걷고, 교회와 사무실을 확인하며 예배 드릴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교회의 목사님께서 시간을 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지금 교회당을 빌려준 Central United Methodist Church 의 Pastor Sarah 였습니다. <여는교회>를 먼저 시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워싱턴 디씨의 한인교회에 대한 비전도 나누었습니다. Sarah 목사님은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시고, <여는교회>를 돕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장소로 매일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열쇠를 받던 날, 얼마나 놀라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2달간의 새벽기도를 통하여, 워싱턴 디씨와 VA/MD 지역에 하늘문이 열리길 기도했습니다. 디씨 지역 한인들의 닫힌 눈과 마음이 열리도록 새벽마다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였습니다. 예배의 문이 활짝 열리도록 먼저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했습니다. 온 세계의 모든 교회들과 선교사님, 목회자들을 축복하며 기도하였습니다. DC/VA/MD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2달간의 특새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하늘문을 여시고 감사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2달의 특새를 마무리 하며,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 드릴 장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지금 특새를 하는 Central United Methodist Church 입니다. 저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예배당과 교육관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앞으로도 계속 새벽예배를 할 수 있도록 예배당도 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새벽기도의 자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여는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DC/VA/MD 지역을 축복하시고, 닫힌 예배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